종례를 마치자마자 가방을 한쪽 어깨에 삐딱하게 맨 광휘가 뒷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이리 오너라!’ 라도 외칠 듯한 당당한 기세였다. 아이들은 모두 눈도 마주치기 싫다는 듯 떫은 표정으로 광휘를 피해서 지나갔다. “가자, 조수와 서기!” “서기라니?” 광휘는 멍한 내 얼굴을 보더니 또 고양이처럼 입술 양끝을 비쭉 올리며 미소 지었다. “도미는 내 조수니...
흐릿한 자줏빛 필터를 씌운 듯한 밤하늘을 지나 쇼핑몰으로 곧장 향했다. 현실에선 밤인데도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하늘에서 해와 달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해질 무렵의 밝기에 가까웠다.쇼핑몰은 내가 평소에 이동하는 행동반경 안에서는 가장 큰 건물이다. 10층은 안 될 같은데 면적이 넓다. 1층엔 패스트푸드 가게와 서점이 있고 2, 3층엔 옷가게, 그 위엔 식당...
“나비야.”나는 낮은 목소리로 내 수호수를 불렀다. 어느새 몬태그와 잡담을 나누던 나비는 내게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네 능력은 주인에 따라 달렸다고 했지?”“그렇구냥.”“난 최강의 마직사가 되고 싶어. 누구보다 강하고, 저 아브락사스를 쓰러뜨릴 수 있는 그런 마직사가 될 거야.”“무모한 일이구냥! 직접 싸워보고도 아직 그런 말을 하느냥? 아브락사스는 소...
나는 샐을 따라 학교 근처의 허름한 5층 건물 옥상에 내려섰다. 학교 건물이 작게나마 보일 정도로 떨어진 거리였다. 1층에는 교복 가게와 분식점이 있고 2,3층은 학원에 4,5층은 독서실로 이루어져 있었다.“이제 어쩔 거야? 요. 도와줄 사람들은 없어. 둘만이라도 가볼 거야, 아니면?”“모르겠어.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어.”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아까는...
샐은 기둥에 기대선 채로 조금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세 개의 그림자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밑에서 올려다본다면 볼 만한 광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토끼귀가 달린 분홍색 조각배에 턱을 괴고 앉아서 예쁜 척을 하는 프랑수아즈, 공처럼 둥그렇게 몸을 부풀린 팔계가 끄는 기구를 탄 오성이, 그리고 우산처럼 보이는 프로펠러를 붙잡고 ...
나는 도서관 옥상에 내려섰다.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듯했던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프랑수아즈가 곁눈으로 쏘아보더니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호랑이도 아닌 주제에 나타난 겁니까, 변태 선배? 이제 앞으로 ‘변태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 라는 속담이 생겨나겠군요.”“내가 변태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지…….”일일이 지적하기도 귀찮아서 난 반쯤 중얼거리듯 ...
그날 밤 새벽 2시. 나는 다시 마직현실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나비의 도움으로 곧바로 이동할 수 있었다. 눈을 잠깐 감았다 뜨는 순간에 이미 보이는 경치가 달라져 있었다. 내가 오성이의 집으로 가기로 한 시간이 2시 반이고 학교 옥상에서 샐과 만나기로 한 게 3시다. 시간은 충분했다. 날아가면 단숨에라도 갈 수 있으니까.마직현실 속의 우리집은 여전히 벽이 ...
친하게 지내는 애들 중에 최오성이라는 녀석이 있다. 별명이 최오덕이니까 어떤 아이인지 다들 예상이 가리라 믿는다. 두꺼운 안경에 살찐 몸집, 약한 체력. 만화에 나오는 오타쿠의 실제 표본 같은 생김새다.거기다 공부를 못 하지는 않지만 안 하는 편. 늘 교과서 밑에 만화책을 숨겨놓는 녀석. 만화와 게임과 인터넷 유행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는 별난 ...
상황이 다급한 데도 한가하게 나비와 말다툼이나 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샐은 곳곳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옥상 위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러다 나를 발견하고는 기쁜지 화난 건지 모를 목소리로 외쳤다.“찾았다! 이플리트 플레임!”그러더니 이제는 방사구에서 굵은 불길을 뿜어내며 다가왔다. 불은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거리를 좁혔다. 나는 다...
케이블카가 무사히 학교 옥상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나는 몇 걸음 걸어 나오다가 그 자리에 힘없이 엎어졌다. 억지로 일어나려고 용을 썼지만 몸을 뒤집었을 뿐이다.거미 몰리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케이블카는 다시 서서히 달을 향해 올라갔고 달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던 거미줄은 햇살에 녹은 눈처럼 사라졌다.멀어지는 케이블카의 모습을 보자 다시 주청 선배가 ...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었다. 나는 여전히 캣츠 클로를 꽉 쥐고 있다. 나는 엎드린 채로 온몸의 힘을 오른손에 집중했다. 그래봐야 겨우 발목 정도를 겨눌 뿐이었지만.나는 힘없는 입술로 중얼거렸다.“나비야, 부탁한다. 끝내주는 걸로 한 방 부탁해.”캣츠 클로가 원거리 공격형 무기로 모습을 바꾸었다. 이전보다 총신이 더 크고 길어졌다.“이름을 짓거냥. 네 정신의...
마송탑이라는 이름만 듣고 사람들은 어떤 모양을 떠올릴까. 뾰족한 서양식 첨탑을 연상할 수도 있고 다보탑, 석가탑 같은 동양식 석탑을 연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마송탑은 그 둘 다 아니었다.굳이 말하자면 벽돌을 촘촘하게 쌓은 원통형 탑이니 서양식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하지만 꼭대기에 위성TV 수신기와 비슷한 둥근 접시가 달렸다는 걸 제외한다면, 예전에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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