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신안고 옥상에 도착했다.평소엔 문이 잠겨서 못 들어가는 학교 옥상을 마음대로 드나드는 건 각별한 체험이었다. 그런데 옥상에는 조금 이상한 물체가 있었다. 가로등도 아니고, 건물 지을 때 공사장에 물건을 올리고 내리는 도르래 장치라고 하면 제일 비슷할까. 그게 가장자리도 아니고 옥상 한가운데에 떡 하니 놓여 있어도 무엇에 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주...
왜 걷자고 했는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날 무렵 알 수 있었다.정면에서 시커먼 형체가 우리를 향해 똑바로 달려오고 있었다.다리가 짧고 팔이 긴 고릴라 같은 체형에 가면과 인형까지, 내가 만난 위사도와 흡사한 외모였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팔다리가 굵고 몸에 수많은 못과 나사, 스프링과 태엽이 박혀 있다는 점이랄까.주청 선배는 나를 흘깃 보며 말했다.“마직사 ...
그 뒤로는 아무런 기억이 남지 않으니 할 말도 없다. 글씨를 펜으로 쓰는지 젓가락으로 쓰는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새벽 2시가 오라는 생각만으로도 길고도 지루한 오후와 저녁을 보냈다.불현듯 깨달았다.이건 마치 데이트 약속을 한 것만 같다는 걸!여자와 단 둘이서 그것도 밤에 만나기로 약속하다니. 지금 생각하...
3장수업을 마치고 종례가 끝났어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집으로 가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타율로 하는 자율학습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습시간이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뒷문에서 관리라는 이름의 감독 교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좀처럼 없는 일이기에 아이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고 나는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과 프랑수아즈의 매서운 눈길이 떠올라 가슴이 철렁...
광휘는 멈추거나 머뭇거리지도 않고 곧장 학교 건물을 나왔다. 이제 좀 있으면 조회시간인데 이게 뭔 짓인가 싶었다. 화단을 쓸거나 운동장 구석에서 잡담을 나누던 아이들도 이제 다 들어오고 있는 와중인데 우리만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처럼 거꾸로 학교를 나오고 있었다. 나는 광휘가 재촉을 하는 바람에 내키지 않았지만 어제 하굣길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최대한...
2장 귀신소동 내가 가진 불행의 힘이 벌써 산정여중에까지 위력을 발휘한 모양이었다. 다음 날 교실에 들어오니 아이들이 삼삼오오 몰려들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같지만 그 표정이나 말투가 심상치 않았다. 일부러 들으려 하지 않아도 무언가 알려주지 않으면, 수다를 떨지 않으면 못 견딜 것만 같아 하는 아이들이 나에게까지도 소문을 전파했...
나는 오후 내내 프랑수아즈가 말한 마력을 느끼는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 고민했다. 나비는 그에 대해 딱히 이렇다 할 방법이나 조언을 알려주지 않고 이렇게만 말했기에 그 아이 말대로 스스로 익혀야만 했다.“난 자연스레 갖고 있는 능력이라 가르쳐줄 수가 없구냥. 너는 숨 쉬는 방법을 숨 쉴 줄 모르는 생물에게 알려줄 수 있겠느냥?”나비의 비유가 얼마나 정확한지 ...
나는 쭈볏거리며 은진이의 뒤를 따라갔다. 이 광경은 누가 봐도 일진에게 삥 뜯기러 가는 모습이겠지. 하지만 내가 두려워하는 이유는 누구도 모를 걸.“저 아이에게도 마력(魔力)이 느껴지는구냥. 하지만 정확한 정체를 알 수는 없구냥. 여기는 마직현실이 아니니까.”고막에 나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은진이도 마직사인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
2장알람 소리와 함께 익숙한 아침이 시작되었다. 밤새 지독한 꿈을 꿨다는 점만 빼고는 여느 때와 똑같은 아침이다. 얼마나 심했는지 내용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다.보통 꿈은 잠에서 깨어 눈만 몇 번 깜박이면 다 사라지고 대략적인 장소나 만난 사람 정도만 기억에 남는데 말이다. 이번엔 고양이가 말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하나도 안 잊어버리고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는 매점으로 가서 샌드위치와 음료수, 과자 같은 걸 사들고 뒤뜰로 나왔다. 뒷문 옆에는 큰 호수도 있고 수령(樹齡)이 오래 되었는지 이리저리 비틀린 나무도 있고 주위에 벤치도 여러 개가 있어서 쉬기에 좋아 보였다. 우리는 비어 있는 벤치에 앉아서 사온 음식을 먹었다. 잠시 아무 말 없이 먹기만 했다. 침묵을 깬 건 광휘였다. “산정여중에 와보니 소감이 ...
소녀는 웃음을 그치더니 빈정거리듯 말했다.“흐응, 내가 보아하니 오늘부로 다시는 여기 안 올 것 같은데? 뭐, 너희들 일이니까 알아서 잘 해봐. 그럼 난 간다.”그러더니 괴물이 몸을 던진 베란다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자, 잠깐만!”나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불렀다. 소녀는 고개만 돌려 나를 보았다. 심드렁한 표정이었다.“뭐? 할 말 있어?”“……도와줘서 ...
고양이의 눈이 찌푸려졌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뭐가 그리 불만스러운지 성난 소리로 쏘아붙였다.“너 고양이 길러본 적 없구냥? 꼭 이런 애들이 개 하면 바둑이고 고양이면 나비지! 센스도 없고 어휘력도 부족하구냥!……할 수 없구냥. 널 만난 게 내 팔자이니 어쩌냥. 그럼 이제 주인으로서 날 부르게냥!”다행히 문 부서지는 소리 때문에 고양이의 잔소리가 제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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