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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언 월드를 탈출하라

엄정진(pilza2) - 『월간 사이언스 플래시 픽션』 2017년 2월호
pixabay,cc0photo | '아동문학사 소년소녀 공상과학' 표지 패러디



주공아파트 뒷산에 아이들의 비밀 놀이터가 있었다. 같은 반 친구인 이들 세 명은 옛날 약수터였던 커다란 시멘트 덩어리 뒤에 스프링이 튀어나온 침대시트를 비롯한 온갖 고물을 주워 모아 자신들의 기지를 만들었다.
오늘따라 석만은 심각한 얼굴로 여동생인 귀영을 데리고 왔다. 흙바닥에 작은 돌멩이로 땅따먹기를 하던 태규와 정호는 호기심과 긴장이 섞인 얼굴로 둘을 보았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여자에게 이곳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본능적인 부끄러움이 피어났다.
“얘들아, 이것 좀 봐.”
석만이 들고 있던 공책을 둘에게 내밀었다. 충효일기를 몇 권이나 청테이프로 붙여서 만든 두꺼운 일기장이었다.
“귀영이는 일기를 열심히 쓰거든. 유치원 때부터 계속 썼어.”
“와, 나는 일기 안 썼다고 몇 번을 혼났는데!”
태규가 혀를 내둘렀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뒤적이던 정호는 어느 부분에서 흥미를 보였다.
“어, 〈일요일 일요일 밤에〉 내용까지 다 적혀 있네? 지구를 떠나거라흐아~.”
정호는 평소 좋아하던 김병조의 흉내를 곧잘 냈다. 석만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날짜를 가리켰다.
“이거 봐. 이건 4년 전 방송 내용이야.”
“어? 이거 어제 본 건데?”
태규는 고개를 갸웃했다. 반면 정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반응했다.
“재방송 본 거 아냐? 아님 옛날 거 또 써먹었겠지.”
“바보야. 테레비를 한두 명이 보는 줄 알아? 재방송 시간도 아닌데 똑같은 거 틀면 전국에서 욕먹어.”
석만이 핀잔을 주면서 일기 여러 곳을 펼치며 설명했다. 귀영은 5년도 전부터 일기장에 빼곡하게 기록을 하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날씨, TV 방송과 뉴스, 〈가요톱텐〉 순위와 유행가 가사까지.
왜 이 일기장이 중요한 문제인지 태규는 이제야 깨달았다.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세상에, 4년 전하고 올해하고 똑같잖아?”
기다리던 반응이 나오자 석만은 한층 열을 올리며 설명했다.
“그치? 여기도 봐. 작년 기록은 5년 전하고 똑같지. 재작년 것은 6년 전하고 같고.”
“별 걸 다 적어놨네. 너네 동생 공부도 잘 하겠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말투였다. 정호는 코를 후빈 손가락을 유심히 보더니 훅 불었다.
태규는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5년 전과 작년 일기장을 같이 펼쳐놓고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넘겨보니 그야말로 판박이였다. TV 방송부터 학사일정은 물론 날씨까지. 같은 날 비가 왔고 같은 날 소풍을 갔으며 같은 날 귀영은 감기몸살로 학교를 쉬었다. 5년 전 같은 날에 스머프 친구들은 가가멜에게 쫓겼고 장두석과 김정식은 같은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뽀미 언니는 뽀뽀뽀 친구들에게 똑같은 얘기를 했다.
어째서 똑같은 일이 4년 후에 또 일어날까? 우린 4년 전에 무엇을 했지?
태규가 그런 의문을 입에 담자 석만과 정호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정호는 마땅한 답이 안 나오자 머리를 긁으며 대충 대답했다.
“그냥 학교 다녔지.”
“몇 학년?”
“4학년 아닌가? 잠깐, 지금이 4학년인데.”
“맞아. 나도 이상하게 생각했어. 어릴 때 기억이 잘 안 나서 엄마한테 물어보니까 내가 다른 애들보다 걸음마도 늦고 말도 늦게 했대. 그래서 그냥 내가 바보인 줄 알았어.”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석만이 목소리를 높였다.
“우린 다 속고 있는 거야!”
태규와 정호가 멍한 얼굴로 쳐다보자 귀영이 처음으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리는 테레비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아. 그러니까 여기는 만화영화 같은 세상이야.”
귀영도 조심스레 자기 가설을 말했다. 딱히 한 살 위인 오빠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았기에 오빠 친구들에게도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석만이 덧붙였다.
“우리 집에 안테나 달아서 일본 방송 나오는 거 알지? 우리 이모가 일본에 살고 아빠도 일 때문에 가끔 일본 다녀오시거든.”
태규가 대답했다.
“너희 집에 가서 일본 만화영화 본 적 있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라서 그림만 봤지만.”
“내가 좋아하는 만화영화가 있어.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했대. 근데 거기 나오는 사람들은 나이를 안 먹어.”
“똑같은 내용을 틀어준단 말이야?”
“아니, 조금 달라. 계절이 바뀌고 애들이 학교 가고 방학이 되고 똑같이 흘러가. 근데 아이들은 학년이 안 올라가고 어른들은 나이를 안 먹어. 시간은 똑같이 흐르는데 하는 행동은 다르니까 내용은 분명히 다르거든. 〈개구쟁이 스머프〉도 똑같애. 스머프들은 맨날 똑같이 살잖아? 이거 봐, 내용도 얘가 다 적어뒀어. 이것도 4년 전 내용하고 똑같더라고.”
태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만화영화 속 세상이라고 했구나. 그럼 우리는 4년마다 되풀이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거야? 근데 왜 아무도 그 얘기를 안 하지?”
석만도 그 질문엔 쉽사리 답을 못했다.
“눈치를 못 챈 거야.”
귀영의 대답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아이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어른들까지 모를 수가 있나.
혼자 태연한 정호만 엉뚱한 말을 했다.
“무슨 소린지 한 개도 모르겠다. 그냥 쌍쌍바 사먹고 집에 가자.”
100원으로 둘이 먹을 수 있는 쌍쌍바는 최고의 인기 아이스바다.
석만은 때리는 시늉을 하며 입을 막았다.
“좀 들어봐. 이 세상은 가짜란 말이야. 우린 다 속아서 살고 있어. 누구 우리 동네 밖으로 나가본 사람?”
잠깐 침묵이 흘렀다. 정호가 머리를 긁었다.
“우리 아빠는 차타고 회사 다니는데.”
“아빠 말고 너 말야, 너.”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집, 학교, 놀이터, 소풍 갔던 뒷산. 살면서 이 이상을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걸어서는 이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간 적도 없다.
태규가 결심한 듯 힘주어 말했다.
“세상이 가짜인지 아닌지 알려면 동네 밖으로 나가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해?”
막상 행동에 옮기자고 하니 석만은 놀란 기색이었다.
“버스 가는 큰 길을 따라 가보면 알겠지.”
“거긴 너무 먼데…….”
가기도 전에 지레 겁부터 먹었다.
그때 부르르릉! 하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반가운 자동차가 산 아래 주공아파트 단지로 접어들었다.
낡은 파란색 트럭은 하얀 연기를 무럭무럭 뿜어대며 천천히 달려가고 있었다.
“빵구차 왔다!”
아이들은 방역차를 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산을 내려갔다. 벌써 아래쪽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이 기를 쓰며 쫓아가고 있었다. 일종의 본능처럼 아이들은 방역차를 쫓아갔다. 연기가 들어가 코가 맵고 숨이 답답해도 죽어라 달렸다.
대부분 아이들은 방역차가 단지를 나가면 아쉬워도 떠나보내곤 했다. 그러나 여기 네 명은 포기하지 않고 따라갔다. 태규가 비틀대는 정호의 팔을 잡아당겼다.
“야, 끝까지 쫓아가야 해!”
“못하겠어. 딥다 힘들어.”
“단단히 쫓아와. 안 그럼 나한테 맞을 줄 알아!”
정호는 입술을 내밀고 툴툴대면서도 주먹이 두려운지 따라왔다.
방역차는 아파트 단지 외곽을 돌더니 아이들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졌다. 이내 동사무소 건물 뒤편으로 사라졌다.
“우리도 그냥 돌아가자, 응?”
석만이 숨을 헐떡이며 애원했다.
“네가 먼저 말 꺼냈잖아.”
“사이렌 울리기 전에 집에 안 들어가면 엄마한테 혼난단 말야.”
오후 6시에는 사이렌이 울리며 국기하강식이 거행된다. 귀영도 주저하는 얼굴로 태규의 눈치를 봤다.
셋을 돌아보며 태규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루 혼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냐. 이건 우리 인생이 걸린 중요한 문제라고. 너희들이 먼저 알아냈잖아. 만화영화처럼 되풀이된다면서. 그럼 무서울 게 뭐있어? 잘못 되어도 어차피 되돌아갈 텐데. 여기서 돌아가면 아무것도 안 변해. 이 세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나는 내 눈으로 확인하고 말 거야.”
설득이 통한 걸까?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귀영이 앞으로 나섰다. 석만은 겁이 났지만 오빠로서 질 수 없다는 고집에 얼른 앞장섰다. 정호는 여전히 주저하는 표정으로 보이지 않는 손에 끌려가듯 힘없이 따라갔다.
일행은 아파트 단지를 나와 포장도로를 따라 인도를 걸어갔다. 6시가 되자 사이렌이 울렸다. 지나가던 자동차도 멈췄다. 모두들 태극기가 있을 동사무소 쪽을 보며 가슴에 오른손을 얹었다.
잠시 멈췄던 여정은 다시 이어졌다. 초여름이지만 해가 지자 도로 한쪽의 산비탈은 급속히 어두워졌다.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역시 돌아가는 게 낫겠어.”
“안 돼. 끝을 보고 말 테야.”
석만이 약한 소리를 꺼내자 바로 태규가 받아쳤다. 오락실에서도 끝판을 볼 때까지 도전을 거듭하는 태규다웠다. 다만 대부분은 동전이 없어서 포기해야 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정호는 계속 배가 고프고 다리가 아프다고 투덜댔다. 석만은 자신의 비상식량인 아폴로를 나누어주었다. 작은 빨대모양 과자를 하나씩 까먹고 껍질을 버리면서 한참을 걸어갔다.
몇 걸음 앞서 가던 태규는 갑자기 멈추더니 비틀대며 뒤로 넘어지려 했다. 석만이 얼른 손바닥으로 등을 받쳤다.
“왜? 뭔데?”
“아야. 뭐에 부딪혔어.”
“날아가는 벌이랑 헤딩했냐? 으헤헤헤헤! 으헤헤헤헤!”
정호가 만화영화 주인공 딱따구리 흉내를 내며 비웃었다. 태규가 버럭 화를 냈다.
“돌벽에 부딪힌 것 같았단 말이야! 이마랑 코랑 무릎이랑 다 아파 죽겠어!”
“바보 멍충아. 앞에 아무것도 없는…… 아이쿠!”
태규를 보면서 걷던 정호도 돌연 충격을 받고 휘청거리다 결국 엉덩방아를 찧었다.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귀영은 얼른 걸음을 멈추고 손을 앞으로 뻗었다. 얼음을 만진 듯 깜짝 놀라 움츠렸다가 다시 손가락으로 앞을 더듬었다.
“여기 벽이 있어! 세상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내밀던 허공에서 손이 막혔다. 매끄럽고 단단한 표면이 만져졌다. 석만은 어깨를 내밀고 조금씩 몸을 밀었다. 꿈쩍도 안 했다.
“유리벽인가?”
아무리 투명한 유리라도 먼지가 묻고 빛이 반사되어 가까이에서 보면 알아볼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여기엔 그런 흔적조차 안 보인다. 분명히 눈에는 저 멀리 이어진 포장도로와 가로수, 건물과 전답, 지나가는 자동차가 뚜렷하게 보이는데.
“여기가 세상 끝인가 봐.”
귀영의 작은 목소리가 선언처럼 무겁게 들려왔다. 아이들은 망연자실해 보이지 않는 장벽 앞에 서있었다. 인도 옆은 2미터가 넘을 시멘트 담장, 그 위로는 소나무와 향나무가 우거진 산이었다.
“저쪽에서 자동차가 온다!”
정호가 가리켰다. 반대편 차선에서 자동차가 왔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까 모두들 숨을 멈추고 지켜보았다. 보이지 않는 장벽에 부딪쳐 자동차가 멈출까. 범퍼가 부서지고 폭발을 할까.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긴장된 순간이었다.
차는 아무 저항도 없이 가볍게 일행 곁을 지나갔다. 멍한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보았으나 상대방도 모른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
“좀 위험하지만 차도로 나가보자.”
태규는 꺼려하는 석만에게 반대편을 망보게 하고 차도로 들어섰다. 손바닥으로 보이지 않는 벽을 더듬으며 옆걸음 치는 아이들의 모습은 어설픈 판토마임처럼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자동차가 지나간 공간도 막혀 있었다. 결국 길을 건너 반대편 인도를 지나 갈대가 무너진 들판까지 벽은 이어졌다.
“차를 타면 지나갈 수 있을까?”
“우리가 택시 탈 돈이 어딨냐? 그럴 돈 있으면 떡볶이에 뽀빠이에 둘리바까지 사먹겠다.”
태규의 고민을 정호가 반박했다. 그럼 버스를 타야 할지, 정류장이 어디인지 고민하고 있는데 석만과 귀영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오빠, 그거 꺼내봐.”
“짜잔!”
석만이 과장스런 동작으로 바지주머니에서 빨갛고 길쭉한 물건을 꺼냈다. 정호가 소리쳤다.
“어! 맥가이버 칼!”
“엄마가 생일 선물로 백화점에서 사다 줬지롱.”
“좀 보자! 그걸 보여주지도 않고 혼자 갖고 있냐? 무슨 국 끓여 먹겠다고 꽁꽁 감추고 있어?”
정호가 매달렸지만 석만은 완강히 거부했다. 태규는 기뻐하며 보도블록 깔린 인도 바깥쪽, 무르고 질척한 땅을 골라 파보라고 시켰다.
석만은 벽 바로 앞에 쭈그리고 앉아 스위스 군용칼, 속칭 맥가이버 칼에서 칼날을 뽑아내어 땅을 파려 애썼다. 아무래도 서툴러서 중간에 정호와 태규가 차례로 캔따개나 톱으로 바꿔가며 땅을 팠다.
20센티미터 정도 파자 깨끗하게 잘린 갈색 땅의 단면 아래로 손을 뻗을 수 있었다. 즉 투명한 장벽 밑의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래쪽은 짙은 검은색 흙이었다. 벌써 해가 지고 어두워져서 그런지 유난히 검게 보였다.
한참 매달려 낑낑대며 땅을 판 끝에 투명한 장벽 아래로 기어갈 수 있을 만한 공간을 확보했다. 반대편은 흙 위에 깔린 보도블록을 끄집어냈다. 연한 초록색에 직사각형 모양이다. 이쪽 인도에 깔린 다이아몬드 무늬가 찍힌 회적색 정사각형 보도블록과는 모양, 크기, 두께가 전부 다르다. 더구나 이쪽은 인도에만 깔렸지 땅을 판 쪽에는 없다. 그런데 이 녹색 블럭은 훨씬 넓은 공간에 깔려 있다.
아이들은 두려움과 호기심을 품고 장벽 밑을 기어 반대편 땅 위로 나왔다. 모두들 흙투성이가 된 채 옷에 묻은 흙을 털 생각도 안 하고 멀거니 보고만 있었다.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건물, 길쭉한 가로등, 하늘 위로 거미줄처럼 뒤덮은 복잡한 고가도로. 미래 상상도에서나 볼 도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건물과 도로는 연탄으로 만든 조각상처럼 시커멨다. 흐릿한 불빛을 뿌리는 가로등 외에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5층짜리 아파트에서 살며 엘리베이터도 타본 적 없는 아이들이 아는 높은 건물이라고는 사진으로 본 63빌딩뿐. 그런데 이 건물들은 100층 아니 1000층은 넘을 것 같아 보였다.
공기는 메마르고 차가우며 분필 가루를 닮은 냄새가 났다. 매끄러운 바닥 위를 걸으면 발자국이 남을 정도로 먼지가 두텁게 쌓여 있었다. 이 빛이 부족한 도시에는 바람과 소리 말고 또 한 가지 아예 없는 것이 있었다.
“아무도 안 보이네. 다 어디 있을까?”
태규는 주위를 둘러보며 앞장서서 걸었다. 정호는 두려움이 가시자 흥분이 밀려오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진짜 만화영화에나 나오는 미래도시야. 근데 진짜 사람이 없어.
어?”
정호는 도로 위에 정차한 자동차로 다가갔다. 도로는 투명 장벽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벽 너머로 아이들이 나고 자란 마을의 풍경이 그대로 보였다. 반대편에서는 이쪽 도시가 보이지 않았음에도.
자동차라고 생각한 그것은 납작하고 둥그스름하며 심지어 바퀴도 없었다. 챙 없는 커다란 모자 같았다.
“야! 함부로 만지면 어떡해?”
소리가 나자 석만이 놀라며 꾸지람을 했다. 행여 들킬까 싶었는지 작은 목소리였다.
“그냥 지가 움직였단 말이야.”
정호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신기한 마음에 먼지 덮인 유리창 위에 손가락으로 자기 이름을 쓰려고 접촉한 순간 문이 열린 것이다. 그것도 위로 들어 올리듯.
“이왕 열린 거 타보자.”
호기심 대장인 태규가 애들을 설득했다. 내부는 퀴퀴한 먼지 냄새 외에는 깨끗했다.
“이거 자동차 아닌데.”
석만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동차라면서 핸들이나 액셀 같은 게 안 보였다. 운전석이 아예 없는 것 같았다.
“그럼 뭔데?”
“그냥 앉아서 쉬는 데 아닐까?”
그때 문이 자동으로 닫히며 내부의 불이 켜졌다.
“안녕하세요? 알유티 서비스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자기 성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구, 깜짝이야!”
“십 년 감수했네.”
“저기요, 저희 그냥 지나가다가……”
아이들은 놀라서 사방을 돌아보며 감탄사나 변명의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어디에서 들리는지 모를 여성의 목소리는 밝으면서도 사무적인 말투로 이렇게 말할 뿐이다.
“행선지를 말씀해주세요.”
앞유리 가운데 부분이 밝아지며 네모난 그림이 떠올랐다. 아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이게 지도인가 봐. 되게 선명해!”
“어떻게 만든 거야?”
앞자리에 탔던 태규가 손가락으로 그림을 만지는 순간 목소리가 또 들렸다.
“무역센터, 원하시는 목적지가 맞습니까?”
“소리가 여기서 나나봐. 전화인가?”
태규는 그림에 귀를 대고 말했다.
“여보세요, 저희는요…….”
아무리 말을 걸고 소리쳐 봐도 상대방은 대답이 없었다.
“들리지는 않나봐.”
“목적지를 말하라잖아. 우리 말이 안 들리면 물어볼 리가 없어.”
귀영이 가장 침착했다. 고민하다가 태규는 손을 내밀어 지도 다른 곳을 만져봤다.
“웨스트엔드 공원, 원하시는 목적지가 맞습니까?”
시험 삼아 여기저기를 마구 눌러보니 그때마다 다른 지명을 댔다.
“이 지도를 만지면 거기로 데려다주나 봐.”
“우와아. 그걸 어떻게 알고? 이 자동차 엄청 똑똑하네?”
“키트다! 〈전격 Z작전〉!”
이번에는 미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석만이 신이 났다. 정호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키트! 출발해!”
그러나 묵묵부답이었다. 태규가 주먹으로 정호를 밀듯이 살짝 때렸다.
“바보야. 목적지를 정해주라잖아. 우리 말은 못 듣나봐. 지도에서 한 곳을 누르면 맞냐고 묻지? 밑에 예, 아니오 창이 뜨잖아.”
컴퓨터를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는 아이들이지만 터치 인터페이스는 직관적이어서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태규는 잠시 생각하다가 도시의 하늘을 보고 목적지를 정했다. 하늘은 건물 숲 너머의 노란 광원을 중심으로 점점 흑청색으로 물드는 그라데이션을 그리고 있었다. 어둠에 묻힌 도시 속에 유난히 밝은 광원이 있을 거란 얘기했다.
우선 그쪽 방향으로 보이는 건물을 누르고 ‘예’를 누르자 자동차는 소리도 없이 출발했다. 그제야 아이들은 비로소 뒤를 돌아보고 자신들이 살았던 세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둥글고 투명한 반구형 장막 속에 익숙한 세상이 보였다. 주공아파트, 길쭉한 목욕탕 굴뚝, 교회의 십자가, 함께 다녔던 국민학교와 비밀 놀이터가 있는 뒷산까지.
광원에 다가갈수록 주위가 밝아졌다. 이 강렬한 빛이 인공 광원임은 분명했다. 흐릿한 가로등 외에는 어둠에 묻힌 도시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사방으로 내뿜는 건물 한 채가 보였다.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환하게 번쩍이는 탑이었다. 아래층은 첨성대를 닮은 유선형이고, 중간에는 UFO 같기도 하고 도넛 같기도 한 동그란 형태이며 상부는 뾰족한 원추형이었다. 한 마디로 고깔모자에 도넛을 끼워놓은 듯한 생김새라고 할까.
아직 대전엑스포가 개최되지 않은 세상 속에서 사는 아이들은 신기하면서 살짝 익숙한, 전통과 미래를 짬뽕한 맛을 제대로 느꼈다. 자동차가 어느새 멈췄다. 소리도 진동도 없어서 아이들은 몇 초 뒤에야 알아차렸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여전히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가만히 들어보니 꼭 여성 같지도 않았다. 또렷한 고음일 뿐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목소리다.
“어, 저희가 돈이 없는데요…….”
석만이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으나 차는 양쪽 문이 위로 올라가며 열릴 뿐 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냥 가도 되나봐.”
“고맙습니다.”
귀영이 차에서 내려 공손히 인사하자 태규와 석만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모두 내리자 문이 닫히고 차는 아무 소리도 없이 길을 따라 가버렸다.
탑에 다가가자 문은 저절로 열렸다. 내부는 환해서 눈이 아플 정도였다. 텅 빈 금속질의 원통형 공간이 펼쳐졌다.
“어서 오십시오, 여러분! 여러분이 처음 통과자입니다.”
조금 더 굵지만 여전히 성별을 짐작하기 어려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무슨 게임이에요?”
정호가 물었다. 귀영이 무심코 말했다.
“여기는 27세기인가봐.”
“왜 27세기인데?”
태규가 묻자 고개를 저었다.
“몰라, 그냥 미래 같아서.”
귀영은 읽었던 『27세기의 발명왕』의 내용은 잊어버렸지만 27세기라는 단어만은 남아서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것이다.
아이들이 공간 가운데에 이르자 바닥 가운데가 원을 그리며 빛나더니 서서히 바닥에서 분리되어 공중으로 떠올랐다. 모두 이동시키자 도넛 구조물은 탑에서 분리되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전면이 투명한 재질이라 아래쪽 도시가, 그리고 점차 행성 표면이 한 눈에 들어왔다.
세상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눈부시게 밝은 탑을 중심으로 점점이 가로등이 불을 밝힌 도시는 어둠에 묻혔고 그 너머로 크고 작은 시커먼 산과 언덕 같은 지형지물이 보였다. 자세히 보면 그 모두가 폐허가 된 도시였다.
그리고 곳곳에 반구형 구조물이 위치했다.
“여러분처럼 어린 분들이 처음으로 도착할 줄은 몰랐어요.”
자동차에서완 달리 감정이 살짝 섞인 목소리였다.
점점 상공으로 올라가자 홀로 빛나는 탑과 유리구슬처럼 흐릿한 빛을 받은 반구들이 보였다. 그 너머에는 그저 바위와 돌밖에 없었다. 죽은 행성 속에서 도시 하나만이 빛나고 있었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태규는 일단 미지의 목소리를 아저씨라고 불렀다.
“외계인인가 봐. 〈브이〉? 나 브이 필통 갖고 있는데! 쓰지도 않고 아껴둔 거!”
정호의 말은 모두에게 무시당했지만 목소리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저희는 외계인이 아니에요. 굳이 말하자면 여러분의 미래죠.”
“우리 미래?”
“여러분이 살던 곳은…… 일종의 보호구역이에요. 샘플이라고 하면 모르겠죠?”
“〈물체종합세트〉에 들어간 거 말하는 거죠?”
귀영이 응수했다. 자신들이 고무찰흙, 자석, 나무조각, 얇은 금속판, 조개껍데기 등등과 같은 처지라니 너무한 것 같지만 막상 이 압도적인 풍경을 보면 달리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여러분이 쉽게 이해하려면 동물원이라고 해야 되겠네요.”
가본 적은 없지만 동물원이라면 아이들도 안다. 태규가 살짝 따지듯 반문했다.
“우리가 동물원의 동물이라고요?”
“사과드릴게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갇힌 공간 속에서 지낸다는 의미였어요. 여러분 아래에 보이는 둥근 공간에는 각자 다른 시대와 환경 속의 인간이 살고 있어요. 그 중에서 여러분은 1980년대 대한민국이죠.”
왜, 어째서 같은 의문이 수십 수백 번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떠올랐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물음을 던질 용기를 낸 사람은 귀영이었다.
“그럼 지금은 먼 미래라는 얘기인가요? 당신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었어요?”
“저희가 얼마나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기다렸는지 짐작도 못할 거예요. 그 길고 복잡한 이야기는 여러분의 작은 두뇌에 다 담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조금씩 차근차근 알려드릴게요.”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의 지혜와 용기를 시험할 때가 온 거죠.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사람을 찾고 있어요. 세상의 정체를 파악하고 벗어날 수 있는 사람. 여러분은 특별한 자격을 가졌습니다. 자신의 세계가 반복되는 갇힌 시공간임을 깨닫고 탈출했잖아요.
이제 그 지혜와 용기를 발휘해야 할 더 큰 무대가 있습니다. 바로 저 우주 저편에 말이죠. 가보고 싶은 생각 없나요?”
아이들의 시선이 자연히 아래쪽이 아니라 위쪽으로 향했다. 밤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 저 속에 다른 세상이 있다니. 얼마나 많은 세상과 다른 존재와 다양한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까. 상상만 해도 숨이 벅찰 정도다.
반응은 조금씩 달랐다. 석만은 얼굴이 창백해져 쪼그리고 앉았고 귀영은 손을 모아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태규는 긴장된 얼굴로 아래쪽 도시와 위쪽 우주를 번갈아 보았다. 정호만 세상모르고 신이 나서 소리쳤다.
“딥다 재밌겠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어요. 지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합니다.”
“어? 다시……는요?”
정호는 곧바로 주눅이 들어 움츠러들었다. 석만이 입술을 떨며 물었다.
“집에 못 가요? 엄마랑 아빠도 못 보고?”
“안 돼요.”
“전화도 못 하나요? 편지는요?”
“전화도 편지도 어떤 연락수단도 없습니다.”
석만은 벌써 울 듯한 얼굴이었다.
“난 갈래.”
그때 귀영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석만이 말리려고 했으나 더듬거리며 말도 제대로 못했다. 반면 귀영은 자신만만했다.
“안 될 거 뭐 있어? 우주로 나간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아톰, 켐로, 다들 우주소년이잖아. 내가 우주소녀가 되겠어.”
“여러분이 선택하세요. 억지로 시키지는 않습니다.”
목소리는 이제 살짝 능글능글하게 들릴 정도였다.
“미안, 난 안 갈래.”
정호는 고개를 저으며 물러섰다.
“재미있을 것 같지만 집에 가고 싶어. 부자도 아니고 늘 용돈 안 준다고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엄마아빠가 좋고 우리 집이 좋아. TV보는 것도 좋고.”
“난 가겠어. 나도 갈 테야.”
태규는 딱히 귀영처럼 희망과 목표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재미있어 보이니까.”
솔직한 마음속은 귀영을 좋아해서 함께 있고 싶어서지만 말할 용기가 없었다. 창피하기도 하고.
남은 석만에게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떨면서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가 말했다.
“알았습니다. 그럼 두 사람은 가고, 두 사람은 남는 것으로 하죠. 마음을 정했나요? 각오가 되었습니까? ‘기회와 모험이 가득한 황금의 땅’, 그렇게 희망에 찬 세상만은 아니에요. 그러나 도전할 가치는 있지요. 알을 깨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태어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일입니다.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하니까요.”
“『데미안』이군요! 읽어봤어요.”
귀영이 반갑게 반응했다.
“다행이네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그리고 남기로 선택하신 분들. 두 분은 이 일을 곧 잊어버리게 될 거예요. 간밤의 꿈처럼 희미하게 떠올리겠죠. 그리고 떠난 두 사람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예요. 그냥 이사를 간 것으로 처리하겠어요.”
위쪽의 우주가 갑자기 사라졌다. 도넛 우주선 상공으로 더욱 거대한 우주선이 나타나 시야를 가려버린 것이다. 시야 끝까지 펼쳐진 거대한 잿빛 원판에는 수많은 불빛이 반짝였다.
태규와 귀영을 향해 가느다란 조명이 뿜어진 순간 두 사람의 몸은 공중으로 떠올랐고 그대로 사라졌다. 도넛 우주선은 다시 천천히 탑으로 내려갔다. 석만과 정호가 탑을 나오자 알고 있었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던 차문이 열렸다.
“지구를 떠나거라흐아~. 우와, 정말 떠났네.”
정호는 김병조 흉내를 내더니 이마를 자기 손으로 살짝 쳤다. 석만은 멍하니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쟤들은 이티(ET)가 되는 거구나.”
둘은 아직 목소리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가면 지금 일어난 일을, 태규와 귀영을 잊어버리게 되리란 것을.
무인 자동차를 타고 돌아오며 둘은 노래를 불렀다. 비록 들어주지는 못하겠지만, 떠나는 친구를 위한 송별의 노래였다.
“이티~ 이티~ 외계에인 이티~. 이티~ 이티~ 내 치인구 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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