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지구에서 강제 퇴거

엄정진(pilza2) - 『월간 사이언스 플래시 픽션』 2016년 7월호
Illustration by Neal Adams, 1979


#접촉
도넛처럼 생긴 우주선이 나타났을 때는 놀라는 사람이 제일 많았다.
크기가 클 뿐 아니라 개수 또한 엄청나다는 걸 알았을 때는 불안해하는 사람이 제일 많았다.
약 300대의 우주선이 위성궤도에 머물렀고 그 중 20대가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뭄바이, 카이로, 서울, 도쿄, 자카르타 등 대도시 상공에 머물렀다. 지구상에서 일대 혼란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
그들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혼란이 사그라지고 대화를 통해 평화적인 교류를 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결론을 내리고 회담 제의를 해올 때까지.

#1차 회담
“제가 지구인 대표입니다. 지구의 언어로 말해도 문제가 없겠습니까?”
“네, 여러분의 놀람과 걱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언어를 배웠어요. 가장 많은 개체수가 이용하는 상위 언어 다섯 가지를 습득했고 그 외에도 열 개 정도 언어는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요. 그러니 평소 쓰시던 언어로 말씀하시면 돼요.”
“생각보다 수월하게 평화로운 대화를 나누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우선 어디서 오신 누구이며 왜 지구를 방문하셨는지 말씀해주시죠.”
“이 자리가 저에 대한 인터뷰는 아닐 텐데요? 저는 통역사이며 전령입니다. 제가 집단의 대표나 의사를 결정하는 존재는 아니에요.”
“그렇습니까? 그래도 이렇게 대표해서 말씀을 하시는 것이니 그만한 권한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와 함께 오신 분들은 지구에서 큰 국가의 외교나 국방을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지구의 영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분들이란 말이죠? 그럼 빨리 해결할 수 있겠네요.”
“해결이라니요?”
“저희는 약속대로 지구를 넘겨받으러 왔습니다. 행성 소유 및 이용에 대한 권리 일체를 양도받기 위해……”
“잠깐만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구를 넘겨받다니요?”
(잠시 지구인 대표단의 항의와 고성으로 대화 중단)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제가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구에 대한 권리를 양도받았다고 하셨는데, 누구에게서요? 왜? 무슨 목적으로? 누구와 약속을 했다는 말씀인지?”
“답답하네요. 그걸 일일이 설명해야 한다니. 대표자들이 왔다고 해서 빨리 처리될 줄 알았는데.”
“우리 인류는 대대로 이 지구에서 살아왔습니다. 인류를 포함해 모든 동식물 전부가요! 당신들이 어디서 온 누군지 모르겠지만 왜 이렇게 멋대로 지구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겁니까? 우린 지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전쟁은 우리도 원하지 않아요. 대충 파악해보니 지금 온 파견단만으로도 지구 문명을 수십 번은 멸망시킬 수 있겠더라고요. 괜히 피해를 늘리지 마시고 현명한 판단을 하세요. 지구 환경이 이 이상 오염되는 건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니니까요.”
“당신들은 우리 질문에 하나도 대답을 하지 않는군요! 우리야말로 불필요한 전쟁을 바라지 않습니다. 지구의 주인으로써 지구를 탐내는 당신들 외계인에게 즉시 떠날 것을 명령합니다.”
“곤란하군요. 격차가 큰 문명 사이의 충돌은 곧잘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고등한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면서도 전혀 대화가 진전되지 않다니 유감스럽네요.”
“외계인 침략자 주제에 의사소통을 운운하다니! 당장 지구에서 사라져라!”
“대화는 끝입니다. 다들 돌아가세요. 지구 시간으로 1년 후에 공격을 개시할 겁니다. 그 사이에 충분한 논의와 준비를 하시고 대화 재개냐 전쟁이냐를 결정하세요.
그 전에 언제든 공격을 해도 무방해요. 우리 쪽은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전쟁
1차 회담이 빠르게 결렬된 이후 지구인은 외계인과의 전쟁 여부를 두고 수많은 토론과 논쟁과 시위와 다툼을 벌였다. 강대국을 중심으로 선제공격을 하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만들어서 쌓아만 놓고 긴장과 불안을 증폭시켰던 핵무기를 떳떳하게 소비하여 감축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실력을 보이고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도 있고.
핵무기 다량 보유국이 쏜 탄도 미사일을 신호탄으로 외계인과의 전쟁이 발발했다. 첫 번째 공격을 받은 우주선은 표면에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이나 폭발이나 추락은 없었다.
정찰기를 보냈지만 내부에 사람으로 보이는 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실제 회담 때도 지구인 대표들이 대화를 나눈 상대가 통역 로봇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늦게나마 알아차린 바 있었다. 외계인은 어디에 있는 걸까?
이어서 궤도상에 대기하던 우주선 300대가 일제히 강하하여 지구상의 인구 밀집지역을 말 그대로 초토화시켰다. 하루도 걸리지 않아 지구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희생되었고 문명의 기반을 잃었다. 인구가 많은 곳은 곧 대도시를 뜻하며 바로 인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이건 전쟁이라 부르기 민망했다. 지구인이 풋워크 한답시고 깐죽대며 잽을 몇 번 날리자 외계인이 묵직한 스트레이트 한 방으로 상대를 녹다운시켜버린 셈이라고나 할까.
외계인이 무슨 무기로 어떻게 싸웠는지 파악도 못한 채 인류는 백기를 들었다.
급하게 새로 꾸려진 지구인 대표들이 한때 도시였던 폐허 위에 착륙한 우주선 안으로 들어가 회담을 재개했다.

#2차 회담
“저는 이 자리에서 지구인의 대표 자격으로 완전한 항복을 선언하며 더 이상 공격을 하지 말아주실 것을 간곡히 요청합니다.”
“알았어요. 이제 말이 통하는 분이 온 모양이죠. 그럼 중단되었던 대화를 이어나가죠.”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지구라는 행성에 대한 소유권입니까?”
“맞아요. 원래 따지고 보면 여러분의 것은 아니죠. 안 그래요?”
“우린 조상 대대로 여기서 살아왔습니다. 분명 인류의 조상까지 포함한다면, 긴 진화를 거치며 늘 지구 위에서 살았던 셈이지요. 그런 우리에게 소유권이 없다는 말씀인지?”
“그게 아니고요, 사실 우리는 세 번째 방문이에요. 소유권은 두 번째 방문 때 이미 양도받았고요. 지금은 그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온 거예요.”
“세 번째라니, 전에는 언제 왔는데요?”
“그때 여러분은 없었어요. 처음 왔을 때는 여러분보다 훨씬 크고 어리석은 종이 번성하고 있었죠.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지적 능력이 떨어져서 그냥 멸종시키고 지구를 소유하기로 했죠. 은하 연방 협정에서도 인정하는 관례예요. 문명을 이룬 지성체가 없고 연방이 관리하지 않는 행성은 먼저 발견한 쪽이 차지할 수 있죠.”
“그게 언제 일인데요?”
“지구 시간으로는 65,823,972년 전이라고 나오네요.”
“백악기 말 공룡 멸종 시기잖아요! 여러분이 공룡을 멸종시켰단 말입니까?”
“꽤 센 놈들이라 독한 요법을 쓰는 바람에 일단 떠났다가 행성이 어느 정도 회복되기를 기다려서 돌아왔더니 새로운 종족이 번성하고 있더군요.”
“그게 두 번째 방문이군요?”
“네. 덩치가 작고 연약한 대신 지능은 훨씬 높아졌더군요. 여러분이랑 꽤 닮았는데 키가 작고 털이 많은 정도 차이? 돌과 가죽을 겨우 다듬어서 쓰는 수준이었어요. 그래도 언어를 쓰는 정도의 문명을 갖고 있어서 공격할 수는 없고 대화를 시도했죠.
가장 많은 무리를 이끄는 대표 여섯을 만나 협상을 통해 지구의 소유권을 넘겨받기로 합의했어요. 대가로 무리의 구성원 모두를 다른 곳으로 이주시켜주는 조건으로요.”
“합의라니, 누구 마음대로요?”
“당시 지구인 대표와 합의를 마쳤다니까요. 여기 계약서도 가져왔어요.”
“말도 안 됩니다……. 어디 보자, 이건 점토판에 유리를 씌운 건가요? 수정인가? 단단하네. 점토판에 적힌 건 글자입니까? 상형문자 같은데.”
“당시엔 언어도 문자도 단순해서 금방 익혔어요. 몇 개 문명권이 쓰던 언어가 다 적혀 있죠.”
“고고학자와 언어학자라면 무척 좋아할 만한 자료로군요. 근데 우리는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이런 원시인이 남긴 점토판 따위로 지구를 포기해야 한다니…… 옆에 이 손바닥 자국은 뭡니까?”
“대표들이 합의사항에 동의한다는 사인이에요. 점토에 손바닥을 찍었죠.”
“영화의 거리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이런 걸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그 발언은 전쟁을 재개하자는 의미인가요?”
“아뇨, 설마요! 절대 아닙니다. 제가 좀 흥분하여 실언을 한 것 같으니 부디 양해해주시길.”
“합의사항과 계약 내용은 여전히 유효해요. 거기에 만료 기간 같은 건 없다는 걸 참고하시길.”
“그럼 당신들은 이제 어쩌실 겁니까?”
“지구인 여러분은 이주하셔야 돼요. 우리가 수송선을 준비해오긴 했는데 예상보다 너무 많군요. 우린 당시보다 10배 이상 증식할 것으로 보고 5천만까지 수용 가능한 우주선을 준비했는데요.”
“지구 인구는 70억이 넘습니다! 잠깐, 전쟁으로 30억이 사망했으니 40억 정도 남았군요. 그래도 어쨌든 턱없이 부족해요.
더 태워주시면 안 됩니까? 우주선이 저렇게 많은데요. 300대가 넘는 걸로 아는데……. 우리의 공격으로는 고작 서너 대에 피해를 입힌 것이 전부지만……”
“저건 다 별도의 목적이 있어서 준비한 거예요. 여러분을 싣고 떠날 용도는 아니죠. 좁고 불편하겠지만 억지로 태우면 2억은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부족합니다. 대체 우리 지구인을 지구상에서 다 몰아내고 나면 여기서 뭘 하실 겁니까? 이 지구를 원하는 목적이 뭐예요?”
“채소를 재배할 거예요. 워낙 물을 많이 먹고 뿌리내릴 땅도 필요한 거친 애들이라 적절한 환경을 가진 행성을 찾기 어려웠죠. 이렇게 조건 좋은 별이 많이 없어요. 남은 건 남들이 다 차지했거든요.”
“고작 지구를 비닐하우스처럼 쓰겠다고 우리보고 다 나가라니……”
“그래서 회담을 진행할 건가요, 말 건가요? 이번엔 좀 말이 통하는 분일 줄 알았는데.”
“언제 안 한다고 했습니까? 진정하세요. 2억 명을 다른 행성으로 이주시켜주겠다는 건 확실한 거죠? 지구와 환경은 흡사한가요?”
“지구처럼 살기 편하진 않을 거예요. 직접 개척을 해야 할 겁니다.”
“이주 대상자 선정은 어떻게……?”
“그쪽에 맡길게요. 대신 최대한 빨리 해주세요. 우리가 이동에 지구 시간으로 몇 십만 년씩 걸리거든요. 이번에 온 김에 확실하게 지질과 수질을 잘 맞춰놓고 씨를 뿌리지 않으면 안 돼요. 투자한 게 꽤 많아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거든요.”

#갈등
전쟁의 상흔이 가라앉기도 전에 지구인은 내분에 휩싸였다. 누가 지구에서 탈출하는 티켓을 받을 것인가?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해서 뽑을 것인가?
지구인 대표도 외계인도 믿을 수 없다며 지구에 남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다수의 의견은 아니었다. 외계인에게 점령당해 어떻게 개조될지 모르는 지구에서 빠져나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시위와 폭동이 끊이지 않고 이주민 선발은 지지부진했다.
40억 중에 2억. 5퍼센트의 선택된 자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을 벌여야 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누가 어떤 기준으로 선발을 한단 말인가? 그게 문제였다.
지구인 대표가 나름 중재안을 마련한다고 나섰으나 자신들과 같은 정치가, 고위 관료를 포함한 부자, 기업가, 연예인, 종교인 등을 우선 포함시키려고 했다가 들통이 나 역풍을 맞았다.
사람들은 대표를 믿을 수 없다며 성토했다. 특히 지식인과 과학자가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했다. 선발 작업은 시작도 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었다.
결국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고 판단한 외계인이 지구인 대표를 호출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3차 회담
“제가 최대한 빨리 결정해달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죄송합니다. 누군들 이주민으로 뽑히고 싶지 않겠습니까? 시간을 좀 더 주신다면……”
“더는 안 되겠어요. 이제부터 우리가 제시한 기준으로 선발하시기 바랍니다. 지구인도 우리의 말이라면 듣겠죠?”
“그, 그야 물론이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우선 2억 전원을 여성으로만 뽑을 겁니다.”
“아니, 왜요?”
“그러고 보니 대표단 여러분은 대부분 남성이군요. 성별이 둘밖에 없으면서 균형 좀 맞춰 오시지 그랬어요.”
“이 회담 내용은 저희쪽 카메라를 통해 위성중계로 전 세계에 방송되고 있습니다. 외계인 여러분은 좀 더 신중하고 현명한 판단을 해주십시오. 세계 인구의 절반이며 더 많은 공헌을 하고 있는 남자들이 이 발언을 어떻게 생각할지……”
“우리가 여러분 눈치를 볼 필요는 없죠. 지난 전쟁의 지휘자 대부분이 남성이던데, 아닌가요? 지구인 입장에서 볼 때 지금의 패배 원인과 책임은 남성 쪽에 더 많이 있을 텐데요.
현재까지 수집한 범죄자의 성비 통계치를 보면 한쪽으로 꽤 많이 기울어져 있는 걸 알 수 있죠. 보다 안전한 사회를 위해 어느 쪽을 더 많이 수용해야 할지에 대한 답은 분명합니다.”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다시 생각해보세요. 사람은 남녀가 있어야 후손을 낳을 수 있단 말입니다. 손바닥도 마주 쳐야 소리가 나지요! 설마 자식을 못 낳게 해서 멸종시킬 작정은 아니겠죠?”
“여러분의 생물학적 특성에 대한 조사는 마쳤어요. 우리가 그 정도 준비도 안 한 걸로 보이나요? 생식에 대한 걱정은 마세요. 우리는 여성과 냉동 정자를 싣고 갈 겁니다. 임신 및 출산을 위한 설비는 우리가 제공해주겠어요. 여러분의 과학 수준으로 만드는 것보다 훨씬 안전할 테니 걱정 마시고요.”
“그렇게 높은 기술력이라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인공 자궁으로 아기를 만들 수 있겠군요? 왜 굳이 한 가지 성별만 요구하는 겁니까?”
“자연 분만의 장점을 무시할 수 없죠. 여러분은 후손과의 유대를 중히 여기는 걸로 아는데요. 양육도 직접 하는 종족이고.”
“아버지와의 유대도 중요하죠, 암요!”
“우리는 집단에 남성이 포함될 때 이익보다 위험이 더 크다고 판단했습니다. 동성부모에게서 자란 자식의 정서에 큰 문제도 없고요. 언급했듯 범죄와 전쟁을 저지르는 과반수이상이 남성입니다. 이에 부정하시나요?”
“아직 인류는 가부장제가…… 사회의 지도자는 거의 다 남자인데……”
“동성 집단이 개체수 관리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지구인은 발정기도 없이 수시로 교미와 출산을 한다죠? 여러분을 이주시킬 장소는 공간이 협소해서 사실 2억 명도 유지하기 버거워요. 그 이상으로 인구를 늘릴 순 없죠. 오히려 줄여야 할 판이니까.”
“잠깐, 전화 좀 받겠습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벌써 전 세계적으로 남자들의 폭력 시위가 발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좀 해주세요.”
“무력 진압을 요청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게 아니고! 남자도 좀 받아달라는 뜻입니다.”
“정말 끈질기네요. 알았어요. 관용은 은하계 모든 종족의 평화를 위해 필요한 이념이죠. 남성의 비율을 10퍼센트 이내에서 허용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너그러우신 외계인님! 이왕이면 좀 더……”
“단 남성은 모두 동성애자 중에서 뽑을 거예요.”
“아니, 그건 또 왜요?!”
“말씀드렸잖아요? 개체수 관리가 중요하다고. 불필요한 출산을 늘릴 수는 없다니까요.”
“저희가 피임을 철저히 잘 할게요, 예? 좀 봐주세요.”
“뭘 믿고? 여러분은 여러분 조상과 우리가 체결했던 계약도 못 믿겠다며 전쟁을 일으킨 종족이에요. 무지한 데다가 사납기까지 하니 대화가 너무 어렵네요. 더 이상 불평하면 우리도 힘으로 대응할 겁니다. 그 편이 우리 입장에선 훨씬 빠르고 수월하다는 걸 명심하세요.”
“지, 진정하세요, 외계인님. 제가 언제 불평했다고. 그럼 이걸로 기준은 정해진 겁니까?”
“당연히 신체조건과 지능이 우수한지를 주요 기준으로 삼을 거예요. 면역력과 정신 건강도 중요한 요소지요. 정신 건강이란 특정 종교나 사상에 심취해서 논리, 과학, 인권 같은 기본 소양을 부정하지 않는지를 가린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여러분의 개체 평균을 파악하고 나면 적절한 기준점을 곧 제시할 겁니다.
참, 또 한 가지. 기준을 통과한 사람이 정원을 초과할 경우 살빛이 짙은 사람부터 우선 선정할 거예요.”
“아니, 그건 또 왜 그럽니까?”
“말씀 안 드렸구나. 가게 될 곳이 지구보다 일사량이 많고 기온이 높거든요.”

#이주
이렇게 하여 이주민 선발이 시작되었다.
외계인이 정한 신체와 정신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 중에서 흑인 여성이 최우선, 다음으로 흑인이 아닌 여성, 다음으로 흑인 남자 동성애자, 이어서 흑인이 아닌 남자 동성애자 순서로 선별되었다.
외계인이 만든 기준에 출생지, 가족사항, 학력, 재산, 권력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런 점들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남성을 중심으로 선발되지 않은 자들의 분노에 찬 시위와 폭동이 이어졌으나 그에 아랑곳없이 선발된 2억 명은 외계인의 수송선을 타고 지구를 떠났다.
이주민은 이 외계인의 고향인 천칭자리 글리제 581 행성계에 도착했다. 선주민은 이미 은하계 중심부로 진출한 지 오래고 남은 것은 문명의 폐허뿐인 황량한 행성이었다.
이들은 〈바위와 모래의 별〉이라 불리는 세 번째 행성에 정착했는데, 온도가 높고 물이 귀하다는 단점을 제외하면 인간이 살 만했다. 외계인은 거대한 암염동굴 속 거주시설에 이들을 수용했다. 예상보다 네 배나 많은 인구의 유입으로 공기, 물, 식량의 부족에 허덕였으나 다행히도 쟁탈을 위한 폭력이 아니라 다함께 아끼고 나누면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길을 택했다.
그들이라고 마냥 행복하게 살았을까. 지구가 아니어도 인간임에는 변함이 없으니 갈등과 범죄가 사라지지 않은 건 당연지사. 다만 폭동, 전쟁, 노예제 같은 대규모 범죄까지 이어지진 않았으니 다행이랄까.
외계인은 인구 통제를 제외하곤 아무런 개입도 없이 자유로이 살도록 내버려두었다. 시간이 지나 사망자가 증가하자 그에 따라 출산을 허용하는 식으로 인구는 1억 명 선에서 유지하도록 했다.
이주민은 점차 동굴 밖으로 나가 개간을 하고 마을을 세웠다. 그에 맞춰 외계인도 인구의 통제를 멈추고 연락마저 뜸해지며 개입을 끊었다. 지구인의 후예는 〈바위와 모래의 별〉에 논밭을 일구며 느리지만 착실하게 문명을 이루어갔다.

#미래
수송선이 떠나자 외계인은 즉시 지구 재정비에 착수했다. 대륙의 모양을 바꾸고 바닷물의 성분을 바꾸는 행성 규모의 대공사였다.
원하는 토지와 수질을 확보하자 싣고 온 외계 식물의 포자를 뿌렸다. 몇 백 년도 지나지 않아 지름 8천 킬로미터짜리 덩굴이 물속에서 산맥 위까지 뒤엉키고 너비 3만 제곱킬로미터짜리 잎사귀 수백만 개가 땅 위를 덮었다.
한편 별 수 없이 지구에 남은 약 38억 인구는 대륙이 이동하고 지질이 변할 때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인류 문명은 완전히 붕괴해 사라졌고 소수의 생존자는 땅 속으로 들어가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10만 년이 흐르자 지구인의 후예는 완전히 새로운 종족이 되어 살아남았다. 현생 인류와 비교하여 덩치는 더 작아지고 피부는 두꺼워졌다. 머리는 납작하며 두뇌 부피는 줄어들었고 다리는 짧지만 팔은 길고 튼튼했다.
그들은 발달한 앞발로 땅속을 파고 다니며 무리를 지어 생활했다. 소리를 내고 앞발을 움직여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으며 식물과 돌을 이용해 동굴 내벽에 보금자리를 만들 줄도 알았다.
지구인이 그들을 보고 연구할 수 있다면 학명을 호모 텍투스(Homo tectus)라 지었으리라.


시리즈 목차 보기

트위터 https://twitter.com/pilza2

pilza2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15
월간 사이언스 플래시 픽션
#17
오빠는 광전사